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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est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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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INTERVIEWER
EDITOR
INTERVIEWEE

2018.05.29
Interview
Noblesse
문지영
전상현





내가 숨 쉬고 사는 공간, 가까이 있고 익숙하기 때문에 서울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가 아는 서울은 어디까지일까? 날마다 새로워지는 서울의 재발견. 이방인이 되어 일상과는 다른 호흡으로 이 도시의 새로움을 즐긴다.

Part 1. NEW ARCHITECTURE
보존과 개발의 정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서울. 도시 컨설턴트와 에디터가 함께 서울을 구석구석 둘러보며 나눈 지금 서울 건축 이야기.


세계적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낮고 반듯한 정육면체 형태로 뻥 뚫린 외관 디자인이 돋보인다. ⓒ선민수


랜드마크를 꿈꾸는 신상 건축

요즘 新용산시대라는 말이 있다. 2013년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의 좌초로 침체된 용산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삼각지에서 한강대교로 이어지는 한강대로 주변에 초고층 아파트와 오피스, 호텔 등이 새로 들어서면서 도시의 인상을 바꾸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이다. 오픈 전부터 세계적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해 화제를 모은 건물. 수직으로 높이 뻗은 건물들 사이에서 무심한 듯 우아한 정육면체 형태가 돋보인다. “기하학적인 면이 어디서 보나 똑같이 구현되는 것을 플라토닉 입방체라고 합니다. 그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형태가 정육면체예요. 사람들이 시각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일 쉽고 빠르게 인지할 수 있죠.” 도시 컨설턴트 전상현의 설명이다.


서울드래곤시티와 용산역을 연결하는 공공 보행 통로 ⓒ선민수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이전 작업을 찾아보면 정육면체 건축은 거의 없다. 그가 새로운 시도를 한 이유는 마천루가 주를 이루는 서울에서 낮지만 반듯한 형태가 오히려 존재감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높이를 줄이는 대신 덩어리감에 집중한 새하얀 정육면체가 회색 도시를 밝힌다. 외관의 묘미 중 또 하나는 건물을 뻥 뚫었다는 사실이다. 건물의 한 군데가 아닌 세 군데가 뚫려 있고, 그것들이 서로 엇갈리면서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채로운 공간감이 느껴진다. “좋은 건축을 가르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친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좋은 친구는 자신의 것만 챙기지 않고 남에게 내 것을 내주잖아요. 건축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좋은 건축인지 아닌지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건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건축은 그 자체로 보면 사유재산이지만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공공재의 성격을 띤다.


2개의 타워를 잇는 스카이브리지는 서울드래곤시티의 명물로 등극했다. ⓒ선민수


보통 건물은 정문과 후문으로 입구가 나뉘는데, 이곳은 4면에 전부 출입문을 두어 어디서든 내통할 수 있다. 계단, 엘리베이터, 화장실 같은 코어는 전부 바깥 모서리로 밀면서 네 군데로 분리했다. 일반 오피스 빌딩의 코어가 정중앙에 위치한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다른 구조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중앙에 놓인 코어를 맞닥뜨리면 남의 빌딩에 들어온 기분이 들죠. 코어를 구석에 둠으로써 오피스 사용자 뿐 아니라 편하게 오가는 대중까지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과 달리 근방에 위치한 서울드래곤시티는 하늘로 치솟은 3개의 타워가 이목을 집중시킨다. 2개의 타워를 잇는 스카이브리지는 명물로 등극하기도 했다. “스카이브리지 자체의 멋보다 그 구조에서 파생된 결과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대형 건축물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길을 막고 땅 위에 우뚝 서는 것입니다. 이 스카이브리지는 아래쪽에 놓일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자신의 몸뚱이를 위로 올려 보행을 막지 않고 길이 이어지도록 공간을 내주었죠.” 서울드래곤시티의 건축적 가치는 지금보다 미래에 빛을 발할 것이다. 용산국제업무지구가 개발되면 용산전자상가와 역세권을 이어주는 하나의 커다란 게이트 역할을 하게 될 전망. 구지역과 신지역이 단절되지 않고 상징적으로 연결되는 분위기를 조성해준다는 의미에서 상업적 건물이지만 긍정적 효과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2남산까지 이어지는 1km에 달하는 보행 덱을 만들고 있는 세운상가. ⓒ선민수 


문지영(이하 문) 최근 새롭게 탈바꿈한 세운상가 보행 덱이 화제입니다. 그런데 아직 보행 덱이 전부 연결된 상태가 아니라 그런지 미완의 느낌이 강하네요. 전상현(이하 전) 지금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해요. 지금은 이곳을 섣불리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미래 시제로 생각했을 때는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죠.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전 세운상가의 재생 프로젝트는 하드웨어만 봐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세운상가 보행 덱이 전부 연결되면 1km에 달하는 메가스트럭처가 되죠. 세계 어디에도 이런 사례는 흔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길을 지켜내는 일, 그 안에는 사양산업으로 치닫는 산업구조 자체를 되살리겠다는 의도가 한 축을 차지하고 있어요. 만물 공장인 세운상가의 산업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 젊은이들이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죠. 아직은 이르지만 보행 덱이 전부 연결되면 감각 있는 젊은이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 겁니다. 장기적으로 그렇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지금은 그렇게 변할 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둔 수준이죠.


세운상가 내부에 위치한 중정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선민수


보행 덱은 단순한 연결을 넘어 많은 변화를 상징합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세운상가에 왔을 때만 해도 길 자체가 삭막했거든요. 한쪽으론 전자상가가 쭉 이어지고, 반대편엔 아무것도 없는 콘크리트 벽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보행 덱을 따라 양옆으로 상가와 점포가 늘어섰어요. 전 쭉 뻗은 길은 단순 보행로가 되는 순간 흡입력이 확 떨어집니다. 서울로7017이 그렇죠. 서울로는 교량이라 상점이 들어설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니에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원으로 조성했죠. 하지만 세운상가 보행 덱은 양쪽으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풍부합니다. 길을 걷다 카페에 들어가 차 한잔 마시거나 레코드 숍에 들러 음악을 들을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계속 찾을 수밖에 없는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접근성도 좋아요. 종묘를 둘러보고 나서 자연스럽게 세운상가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죠. 마치 하나의 루트처럼.  전  2009년에 세운상가와 종묘 사이에 있던 현대상가를 철거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손바닥만 한 공원을 만들었죠. 이번에 레노베이션을 하면서 그 공원을 없애고 종묘와 연결되는 횡단보도부터 세운상가 2층까지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광장으로 바꿨습니다. 건축적으로 보면 정말 칭찬할 만한 일이에요.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오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만나면 흐름이 끊겨버리니까요. 보행 덱이 완성되면 종묘부터 남산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석유비축기지가 레노베이션을 통해 문화비축기지로 거듭났다. 탱크 내부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모습. ⓒ선민수


세운상가를 보면 우리나라 건축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는 반세기 넘게 철거의 문화가 강했잖아요. 부수고 새로 지어야 좋다는 주의가 팽배했죠. 지금은 유럽처럼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유산을 가꾸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어요. 하지만 그 대상을 정의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전 기본적으로 산업 유산, 냉전시대 유산, 토목 유산이 해당됩니다. 세운상가가 산업 유산이라면 마포의 문화비축기지는 냉전시대 유산으로 볼 수 있어요. 문 1970년대에 두 차례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석유를 비축하기 위해 만들었죠. 그 거대한 5개의 탱크가 문화 공간으로 바뀔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주변 상암동 일대가 미디어시티로 바뀌고, 쓰레기 매립지는 월드컵경기장으로 바뀌어도 이곳만은 폐쇄된 채 꿋꿋하게 남아 있었잖아요. 전 지금 서울은 과거 산업 유산과 버려진 유휴 공간을 새로운 자연 쉼터나 문화 공간으로 재생하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어요. 마포 문화비축기지도 그중 하나죠. 그런데 이곳은 레노베이션 과정이 꽤 독특합니다. 석유비축기지는 돌산인 매봉산에 만들었죠. 돌산에 작은 진입로를 내고 공사를 시작했을 겁니다. 그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 발파한 뒤 큰 구덩이를 내 탱크를 만들어 넣고, 콘크리트 옹벽을 주변에 세우고 흙으로 덮으면서 다시 진입로를 빠져나왔을 테고요. 그 공사 과정을 유추해 과거의 진입로를 찾아냈고 현재의 출입구로 만들었어요.



1번 탱크와 2번 탱크를 일부 걷어내 새로 만든 6번 탱크. 녹슨 철판을 그대로 살려 멋스럽다. ⓒ선민수


거의 유적을 발굴하는 수준이었겠네요. 그런데 석유비축기지에는 탱크가 5개였는데, 이곳엔 6개의 탱크가 있어요. 전 1번 탱크와 2번 탱크를 일부 걷어내 6번 탱크를 새로 만들었죠. 1번 탱크를 걷어낸 자리에 유리 탱크를 만들어 전시장으로 쓰고, 2번 탱크는 야외 공연장으로 만들었어요. 3번 탱크는 원형 그대로 보존했고, 4번과 5번 탱크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전시장으로 사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새로 지은 6번 탱크는 커뮤니티센터로 운영하고요. 문 녹슨 철판을 그대로 살려 정말 멋스러워요. 새로 지은 6번 탱크도 1번과 2번에서 해체된 철판을 가져다 써서 그런지 원래 있던 탱크 같고요. 전 이곳에는 보존의 그라데이션이 있습니다.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것도 있고, 원형을 레노베이션한 것도 있고, 원형의 자재를 가져다 재구성한 것도 있고. 옛 기억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보는 묘미가 더 살아 있어요.


서울 건축은 현재진행형

요즘 서울의 건축을 보면 서울이라는 도시를 어떤 방향으로 바꾸려는지 그 힌트가 보인다. 서울로7017, 세운상가, 영동대로 복합환승센터 개발은 모두 같은 이야기다. 교집합은 보행권. “선진국과 후진국은 보행권이 얼마나 보장되느냐에 따라 나뉩니다. 표면적 이유는 인권 보장이에요. 도시에서는 인권을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하고, 걸을 때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죠. 실리적 이유를 들자면 보행이 활성화되면 지역경제가 살아나고 부동산 가치가 올라가요. 실제로 보행권이 보장되면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행복지수가 상승합니다.” 국가의 존재 이유가 국민의 행복이라면 경제 활성화, 자산 가치 증대, 행복이라는 가치를 만족시키는 보행권을 보장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건축이 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아닐 테지만, 서울은 점점 더 걷기 좋은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